해파랑길 종주기

해파랑길 27차 상맹방~추암

들메 2019. 4. 15. 09:45


3월 17일 상맹방해변 07시 20분 오늘구간을 시작한다



유체꽃 만발 할 때는 축제도 연단다

강원도에 아마도 유일한 유체밭 일게다

한재밑 해변은 맹방해변의 연장인데 한재 아래 있다해서 이렇게 불린다

해파랑길은 도로를 따라 한재로 진행





한재 소공원

한재는 고려 공양왕이 나라를 빼앗기고 남쪽으로 유배를 갈 때

눈물을 흘리며 넘었던 한맺힌 곳이라고 해서  한재라 한단다


맹방해변



삼척항 정라진 방파재



삼척 시내로 들어서니 거대한 시멘트 공장이 먼저 반긴다




해파랑길은 오십천변을 따라 죽서루를 돌아 이어지는데

우리는 해변길로 바로 선택 삼척교를 건넌다



며칠 전 내린 눈으로 먼 산이 하얗다

삼척이란 지명은 실직에서 유래하는데 그 뜻은 '3개의 하천을 끼고 있는 지역'이다.

1916년 「삼척군지」를 편찬한 심의승에 의하면 실직-시젹-삼척으로 변천했고,

실직이 변해 오늘날 사직동이 된 곳에 당시 '시적골'이란 지명도 남아 있었다고 한다.

한자 실은 시로 읽는다. 시는 삼(3)• 젹은 하천을 끼고 있는 골짜기를 의미한다.

3곳의 하천은 북평의 전천, 삼척의 오십천, 근덕의 마읍천이다.

시를 3이라고 하는 것은 경상도 말로 3을 '시개•시나'로 발음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3개의 하천을 끼고 있는 지역'이란 뜻의 '실직'을 한문으로 쓰면 석삼•오를척 삼척이 되는 것이다.

젹을 척으로 표기한 것은 정확히 한자로 옮길 수 없으면 비슷한 발음의 한자로 쓰던 관행으로 보면 된다.


삼척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시대부터이다.

삼한시대에 이곳은 실직국(悉直國) 또는 실직곡국(悉直谷國)이었는데,

102년(파사왕 2)에 신라에 합병되었다.

그 후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468년(장수왕 56) 일시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으나,

505년(신라 지증왕 6)신라가 다시 회복해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고 군주(軍主)를 파견하였다.


1980년 4월 1일에 삼척군 북평읍과 명주군 묵호읍을 통합해 동해시를 설치했고,

같은 해 12월 1일원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1년 7월 1일 장성읍과 황지읍을 통합해 태백시가 설치되었으며,

1982년 9월 30일에 군청사를 삼척읍 성내리에서 교리로 이전하였다.

1986년 1월 1일삼척읍이 삼척시로 승격




삼척항



삼척 해안 이사부길로 진행한다


이사부 장군

태종(苔宗)이라고도 한다. 성(姓)은 김씨(金氏)이며, 내물왕의 4대손이다.

거칠부와 함께 진흥왕을 도와 영토확장에 큰 공을 세웠다.

505년(지증왕 6) 주·군·현을 정할 때 파시이사금 때 복속된 실직국(悉直國)을 주(州)로 삼았는데,

이때 군주에 임명되었다. 512년에는 하슬라주(何瑟羅州:지금의 강릉)의 군주로

우산국(于山國:지금의 울릉도)을 정벌할 것을 계획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이 어리석고 사나워서 위세로 항복받기는 어렵고

계교를 써서 복속시킬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무로 사자(獅子)를 많이 만들어 전선(戰船)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가서

거짓말로 말하기를 "너희들이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를 놓아 밟아 죽이게 하겠다"고 했는데,

그들이 두려워 곧 항복했다고 한다.


541년(진흥왕 2) 상대등·시중을 겸할 수 있는 최고관직의 하나인 병부령이 되었다.

 545년에는 왕에게 국사를 편찬할 것을 제의해 〈국사 國史〉가 편찬되었다.

550년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함락하고 고구려는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함락했는데,

왕은 이사부에게 두 나라 군사가 피로에 지친 틈을 타서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이사부는 두 성을 공격하여 점령한 뒤 증축하고, 군사를 주둔시켜 지키도록 했으며,

고구려가 군사를 보내 금현성을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을 추격하여 대파했다.

 2년 뒤 신라는 백제군이 점령하고 있던 한강 하류지역을 기습 공격하여 이를 몰아냄으로써

 한강유역 전부를 독차지하게 되었다.

단양적성비에 의하면, 이사부는 549년을 전후하여 한강 상류지방을 공격해 신라 영토를 크게 넓혔다.

또한 562년 9월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왕의 명령을 받고 공격했는데,

이를 계기로 신라는 대가야를 멸망시켰고 낙동강하류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해변의 멋진 바위들






 

새천년 해안유원지

소망탑 조각공원등 볼거리 많은 해안길이다







조각공원



초소아래 뚜꺼비 바위



후진항


솔비치타운



삼척 해수욕장





 삼척 바다의 상징 촛대바위가 보인다







증산해변과 촛대바위

증산해변은 삼척시내에서 4㎞ 가량의 근거리에 위치한 조용하고 아담한 곳으로

평균수심 1∼2m 정도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안전하게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동해시 소재인 추암해변과 접경하여 추암 촛대바위 일출을 한 눈에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동해시의 명소 추암 촛대바위는 수중의 기암 괴석이 바다를 배경으로

촛대바위와 함께 어울려 빚어내는 비경으로 감탄을 자아내는 장소다.

촛대처럼 생긴 기이하고 절묘한 모습의 바위가 무리를 이루며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모습은 가히 장관이다.

촛대바위와 주변 기암괴석군을 둘러싼 바다는 수시로 그 모습을 바꾼다.

파도 거친 날에는 흰거품에 가려지며 승천하는 용의 모습을 닮기도 하고

파도 잔잔한 날에는 깊은 호수와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곳 해돋이는 워낙 유명해 많은 여행객들과 사진작가들로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우암 송시열도 이곳을 둘러보고는 발길을 떼지 못했다는 말이 전해지는 곳이다.

촛대바위, 형제바위의 일출은 애국가 첫 소절의 배경화면으로도 자주 나온 곳이다.

* 촛대바위의 전설
옛날에 한 어부가 살았는데, 그 어부에게는 정실이 있었다고 한다.

그 정실이 얼굴이 밉상이었는지, 마음이 고약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부는 첩을 들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첩이 천하일색이라, 정실의 시기를 사고 말았고, 밥만 먹으면 처첩이 서로 아웅다웅 싸우는데,

종래는 하늘도 그 꼴을 보지 못하고, 그 두 여인을 데리고 갔단다. 그

러자 홀로 남은 어부는 하늘로 가버린 두 여인을 그리며 그 바닷가 그 자리에 하염없이 서 있다가

망부석처럼 바위가 되었는데, 그 바위가 지금의 촛대바위라고 한다고 한다.

지금의 촛대바위 자리에 원래는 돌기둥이 세 개가 있었다.

런데 작은 기둥 2개가 벼락을 맞아서 부러졌는데, 그것을 두고 민가에서 야담으로 꾸민 이야기가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라고 한다.









11시 30분 구간 종료       상맹방~추암 13k 4시간

시내 태백 물닭갈비로 점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