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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랑길 종주기

해파랑길 20차 병곡휴게소~후포항


8월 19일 해파랑길 20차

오늘은 여름 단합행사 하는날  뜨겁던 날씨도 수구러들어

걷는 데 어려움이 없다

9시 20분 병곡 휴게소 도착  구간 시작

병곡리 동명의 유래는 지형이 자리(자루)와 같이 되었으므로 자리실, 자래실, 또는 병곡,

옛날 포성성터가 있어 포성(浦城)이라고도 하였다.
이 마을은 어느 시대인지 알 수 없으나 안씨(安氏), 김씨(金氏)성을 가진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 하며,

병곡이라는 이름은 16세기 중기(1550년경)인 명종(明宗) 연간에 당시 영해부사(寧海府使) 장응두(張應斗)가 명명했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 북이면(北二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병륙(柄陸), 병진(柄津)을 병합하여 병곡동이라 하고

영덕군 병곡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병곡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행정동으로는 병곡1,2리로 분동되어 있다.
병곡리의 위치는 동은 동해, 서는 영리, 남은 거무역리, 북은 백석리와 연해 있다.


옛 7번 국도길


1박 2일 촬영지라는 펜션

1박 2일이 티비에서 방송되면서 알려지기 시작한 섬들과 마을들은

지금 유명 관광지가 된 곳이 많다

방송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 수 있다


백석해안


백석리 동명의 유래는 마을 북쪽에 흰빛의 큰 돌이 있으므로 흰돌, 힌둘 또는 백석이라 하였다.
옛날 백륙(白陸) 또는 백진(白津)으로 알려진 마을로, 작은 항구로 형성된 마을이 되어 조선시대에는 왜구의 침입이 잦았다.

성종(成宗) 10년(1479) 석주(石珠) 안이현(安履鉉)이 방어진을 구축하고 왜구를 물리쳤다고 하며,

그 뒤 16세기초에 장택곤(張澤坤), 맹문호(孟文浩)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딸린 백석부곡(白石部曲)이었는데, 북이면(北二面)에 편입되었으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병륙동, 백륙동, 백진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백석동이라 하고

영덕군 병곡면에 편입하였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백석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며,

현재 행정동으로는 백석1,2리로 분동되어 있다.
백석리의 위치는 동은 동해, 서는 영리, 남은 병곡리, 북은 금곡리가 있다.









현재 도로명 주소는 분명 편리한 것도 있으나

이것은 도로구분이 이 확실한 계획도시에서 유용하다

우리나라처럼 작은마을과 골목으로로 이어진 길이 있는 동네는 도무지 이용가치가 없는

주소인데 정부가 시행하고자 하니 딱하다

마을의 역사와 삶이 전하는 이름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칠보산 휴게소 도로옆 해안 데크길


자갈해변은 정비중  아마도 걸어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드는 것 같다


오늘구간 종착지 후포가 보인다



하늘의 구름은 아름다운 그림




이제부터는 울진군이다

부산에서 걸어서 여기까지 새삼 한발 한발 걷는 발걸음 위대함을 느낀



 배롱나무꽃 가로수 옛길은 정취가 있다


후포 금음리로 들어서고

마을 뒷산에 광산이 있어 일본에 광물을 수출하였다 하며, 광물 또한 풍부하다 하여 마을 이름을 쇠골이라 불러왔으며,

금음리(金音里)라는 마을 이름도 이 광산에 연유된 것이라 한다

1275(고려 충열왕 3)에 평해군 남면(南面) 야음리(也音里)로 되었다.

191431일에 울진군 평해면 금음리로 되었고, 1944년에 금음리에서 분구(分區)되어 금음1리로 되었으며

1953119(면조례 제15) 평해면 후포출장소 관활이 되었다.

1980121(대통령령 제10050)에 평해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평해읍 금음1리로 되었으며,

1986327(대통령령 제11874)에 후포출장소가 면()으로 승격되어 후포면 금음1리로 되었다.




막바지 여름바다에서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



후포 해변


 

후포의 역사

 삼한(三韓) 때에는 진한(辰韓)과 예()에 속하였고, 신라 진흥왕 때에는 비량현(飛良縣)에 속하였으며,

고구려 때에는 근을어현(斤乙於縣)에 속하였다가 영내현(榮乃縣)에 속하였고 다시 신라 비량현에 속하게 되었으며

무열왕 때에는 야음현(野音縣)에 속하였다. 고려 현종때에는 예주(禮州)에 속하였고,

명종 3년에는 기성현(箕城縣)에 속하였으며, 충열왕 때에는 평해군(平海郡) 남면(南面)에 속하였다.


 이 마을은 고려 말엽에 순흥안씨(順興安氏)가 터전을 마련하고 안동권씨(安東權氏)가 개척하였다 하며,

191431일에 군()이 통폐합(統廢合)되어 강원도 울진군 평해면(平海面) 후포리(厚浦里)로 되었다.

 1935년에 후포에 축항(築港)을 하였고, 1944년에 후포리(厚浦里)1(一里), 2(二里), 3(三里)로 분구(分區)되었다.

 1953119일에 평해면 후포출장소에 속하였고, 1968114일에 후포등대가 설치되었고

1970년에 후포1리에서 후포4리가 분구(分區)되었다.

1980121(대통령령제10050)에 평해면이 ()으로 승격되어 평해읍 후포1리로 되었다.

1986327(대통령령제11874)에 후포출장소가 면으로 승격되어 후포면 후포1리로 되었다.

1992년에 후포1리에서 후포6리가 분구되었다.





후포 해수욕장




 릉도 가는 후포 여객터미날 도착 구간 종료

병곡휴게소~후포터미날  10k  3시간






























후포등대와 등기산 공원 스카이 워크 탐방하고

양산에서 단합 저녁식사

해파랑길 딱 절반 구간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