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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랑길 종주기

해파랑길 11차 구룡포~호미곶



11월 19일 11차

가을은 깊어 가는데 때이른 추위가 찾아와 전국이 초겨울 날씨

0930분 구룡포 도착 구간을 시작한다

구룡포의 유래
구룡포읍 병포리 해안 절벽에 구룡산맥(九龍山脈)이 흘러오다.

멈춘 곳에 기암용문(奇巖龍門)이 있는데 구룡승천지지(九龍昇天之池),

또는 구룡소(九龍沼)라 한다.
신라 진흥왕 때 장기현감(長 縣監)이 각 마을을 순찰하던 중 용주리(龍珠里)

 - 현 구룡포 6리 옛 지명은 사라리(沙羅里)를 지날 때 별안간 천둥과 폭풍우가 휘몰아쳤다.

그 비바람을 뚫고 병포리 해안에서 용 열 마리가 승천하다가 불행하게도 현감의 눈 앞에서

그만 한 마리가 떨어져 죽고 말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애석하게 아홉 마리만이 승천하였다고 하여 구룡포라고 불렀다.

 
또 다른 전설은 신라 때 형산강이 형제산에 막혀 있었기 때문에 장마만 지면 안강지역은

물론 경주에  이르기까지 물이 고여 그 피해가 극심하였다.

이를 해결하려고 경순왕과 왕자가 백일기도를 드렸는데  그 마지막 날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왕자에게 말했다.
"네게 이 주문을 줄테니 초아흐렛날 형제산 밑에 가서 외어라,

그러면 너는 구렁이가 될 것이다.
구렁이가 된 너를 보고 용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너는 용이 될 것이다.

그 때 하늘로 오르면서  꼬리로 산의 중허리를 쳐라, 산이 갈라지고 물이 흐를 것이다."
구렁이가 된 왕자는 용이라고 불러줄 사람을 기다렸다.

그런데 지나가는 사람마다 '구렁이 봐라!' 고  외치며 도망칠 뿐 한 사람도 용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왕자가 낙심을 하고 있을 때 한 할머니가 우는 아이를 업고

가다가 그 아이를 달래기 위하여  "자꾸 울면 저 구렁이가 널 잡아 먹는다!"하고 겁을 주었다.
그러자 울고 있던 아이가 울음을 뚝 그치더니 

 "할머니 구렁이가 아니라 용이야 용!"하고 소리쳤다.

그 말 끝에 왕자는 용이 되어 하늘로 오르면서  꼬리로 힘껏 형제산 허리를 쳤다.

천지가 진동하면서 산이 두쪽으로 갈라지고 경주 일대에 괴였던  물이 빠져 강을 이루었다.

그 강이 지금의 형산강이고 그 때 떨어져 나간 산등성이가 날아가서

장기곶을 이루게 되었다 한다. 용이 쳐서 만든 땅이라하여 구룡포라 불렀다고도 한다





조일통산장정이 체결되고 난 후 일본인이 조선으로 와서 살았던 곳으로

일식 가옥 몇채가 남아있던 것을 포항시정돈해서 관광지로 활용하고 있는 곳이다.

이 곳에 살던 하시모토 젠기치의 집을 근대역사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을 비롯해서

당시의 요리집, 찻집 등이 보존되어 있고 소학교와 우체통 등이 당시 모습으로 재현되어있다.

당시 이 곳에 살았던 일본인들의 모임으로 '구룡포회'가 있다.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촬영지로 쓰이던 곳이기도 하다.









아픈 역사이지만 그대로 보존하여반성하고 기억하여 후손에게도 그대로 물려주어

교훈으로 삼는 것이 역사라 생각하는

현재도 잘못된 것이라 모두 지워버리고 없애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일본인 가옥 거리을 둘러 보고

본격적인 해파랑길 걷기 시작하는 데  차가운 바닷바람이 거세게 분다








포항 명물 과메기가 해풍에 익어 간다


구룡포 해수욕장

해안경관이 수려하고 피서지로 각광받는 구룡포 해수욕장은 포항에서 24km,

구룡포읍에서 1.5km쯤 떨어져 있다. 반달형의 백사장은 길이 400m, 폭 50m나 되어

야영을 즐기는 피서객들이 선호하는 곳이다




경주 주상절리보다는 작은 규모이지만 다른 모습의 주상절리이다



다음 포구 삼정항이 보인다

동해안의 포구는 모양새가 거의 비슷하다 약간 들어간 해안에 방파제를 쌓고

작은 항을 만든 형태  크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거의 유사하다


햇빛에 반짝이는 바다 눈 부시다





삼정(三政)은 옛날에 3정승이 살았던 곳,

혹은 삼정승을 지낸 분이 살았다는 얘기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가운데 보이는 섬

삼정섬이라고 불리는 이 섬은 관풍대(觀風臺)라고도 하며

소나무가 울창하고 경치가 아름다워 바람 맑고 달 밝은 밤이면 신선이 놀았다 한다.

지금은 섬까지 방파제가 연결되어 있어 낚시꾼들이 많이 찾아들고 있다. 


어김없이 사당도 있고



파도가 거센날은 갈매기도 쉬는 날

해안에 앉아 있다가 리더가 날아오르면 일제히 날아오른다


석병리로 들어 서는데 옛지명은 두일포였던가 보다

해안선을 따라 바윗돌이 병풍을 둘러쳐 놓은 것 같아 석병이라 이름 지었다는 석병리

최동단 땅끝  석병1리는 자연 부락 이름으로는 두일포(斗日浦)로 조선 효종때  이곳으로

유배온 송시열과 연관이 깊다.
이곳으로 유배 온 송시열은 바닷가 큰 나무가 있는  노적봉 바위 아래 백사장에서 울분을

삭이며 흰 모래를 말에 담아 뿌리며 세월을 보냈다 하여

두일포(斗日浦)라고 불러지게 되었단다


현재 우리나라의 지명은 대부분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일본이 만든것을 그대로 사용한다

우리나라 고유의 지명은 거의 다 없어지고 일본인들이 만든 지도와 지명을 사용하고 있고

근래에는 도로명 주소로 바꾸면서 그 지명 조차도 표시하지 않아

마을의 이야기가 역사가 언젠가는 없어질까 염려된다

나라의 관련자는 옛이름을 복원하고 보존하는 것이 역사의 도리라 생각해 본다

비단 마을 뿐인가  산의 이름도 마찬가지다



폐허가 된 민가도 보인다






바닷가에 보이는 조형물

무얼까 궁금하여 찾아보니 동해땅끝 표지석이다

한 머리의 호랑이가  남북으로 두 발을 딛고  유라시아대륙을 향해 포효하는 듯한 모양의

한반도 동서남북 땅끝으로 알려진 곳으로는

호랑이의 머리부분인 북단은 함경북도 온성,

앞발을 디딘 서단은  충남 태안군 소원면 파도리 산하루 마을,

남으로 길 게  호랑이의 왼 뒷발이 뻗은  남단은 전남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갈두 마을이고 

오른 뒷발이 버틴 동단은 경북 포항시 구룡포읍 석병1리 두일포(斗日浦)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오른 발 위로 꼬리를 말아 올린 곳이 호미곶이다.

(빌려온 글)

한반도 동쪽  땅끝 마을 석병리 두일포(斗日浦)를 아는 사람은 별로다.
호미곶 등대길인 925번 지방도를 타다가 도로변에 세워진 

 '한반도 동쪽  땅끝 마을'이란  이정포를 보고 동쪽땅끝이란 호기심에 들린 여행객들이  

웹에 올린 몇 장의 사진들이 두일포에 대한  정보의 전부다.
'한반도 동쪽  땅끝 마을'이란 이정표는 큼직하지만 들머리길은 겨우 차한 대가 지날정도의

농로로 중간에 차라도 만나면 난감해진다.
농로가 끝나는 바닷가에는 꽤 규모가 큰 양식장이 있고 왼쪽으로 사물실인 듯한 건물과

수산물 가공 공장으로 주차공간이 없다.
'한반도 동쪽 땅끝비'비는 양식장 건너편 갯바위에 보이는데 초행자는

어디로 들어가는지 난감하다.
갯바위와 이어진 양식장 동쪽 바다쪽은 철초망으로 막아 진입이 불가능하다.

천사 양식장을 가로 질러야 비석으로 가는데 지금은 물고기를 넣지 않아 양식장 칸막이

통로로 아슬아슬 통과 할 수 있다.
한반도 동쪽 땅끝비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갯바위에 4각 받침에 지구 모양의 돌을 얹은 모양새의 한반도 동쪽 땅끝비는

호미곶 등대가 그리운 듯 마주보고 있다.
국민관광지로  해남의 관광 아이콘으로 뜬  토말 갈두리와는 비교도 되지않지만,

진입로 확포장과 주차 공간만이라도 마련해 두는 것이 항반도 동쪽 땅끝 마을을 찾는

여행자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자료사진)

이렇게 중요한 곳을 방치한 포항시는 각성하길 바란다



멀리 호미곶 등대가 보인다








포구 옆에 성혈바위다.

성혈(性穴)은 선사시대 신앙의식의 하나로 돌의 표면에 파여져 있는 구멍을 말한다.

원형은 태양, 여성의 성기, 알, 구멍 등으로 상징되며,

당시 인구 증가에 따른 생산량 증대의 필요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석병리를 뒤로 하고 잠시 소나무숲도  걷고


강사리 다무포 고래마을로 들어선다.

다무포는 숲만 무성하고 없는 것이 많다는 뜻으로 풍자하여

다무포(多無浦)라 불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래마을은 무슨 근거로 붙여진 이름일까.

 옛날에는 고래가 많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해안으로 데크길이 열려있다



해국이 아직도 가을임을 알리고






바닷가 바위에 부딪는 파도를 담아본다

파도야 파도야 어쩌란 말이야!









강사항






강사항 아름다움을 노래했건만

지명의 유래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해안 데크 를 지나니 바위들이 넓게 펼쳐진 아름다운 해변이다



호미곶 등대와 새천년 기념관이 보이고






대보항



호미곶 도착

호미곶은 한반도 지형상 호랑이 꼬리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 자리가 천하 명당이라는 이유로 일제강점기엔 이곳에 쇠말뚝을 박아 정기를

끊으려 했으며, 한반도를 호랑이가 아닌 토끼로 둔갑시켜 교육시키기도 했다.

이곳에 자리 잡고 있는 호미곶 등대

경상북도 기념물 제 39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등대


슬픈 역사를 살펴본다.

1901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에서 러시아 세력을 몰아

내기 위해 러일전쟁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일본의 실습선이 염탐을 위해 대보리 앞바다를 지나가다 암초에 부딪쳐

전원이 익사한 사건이 있었다.

일본이 그 사건의 책임을 고스란히 우리 정부에게 떠넘겼다.

이를 계기로 빚까지 내가며 세운 등대가 푸른 하늘아래 우뚝 솟아 동해를 내다보고 있다.

해맞이광장에 안치된 ‘영일만 호미곶 일출 불 씨’ 앞이다.

이 불 씨는 2000년 1월 1일 호미곶 첫 일출 정기를 모아 채화한 것이다.














호미곶의 이곳 저곳을 둘러보고 역사를 생각하며

해파랑길 11차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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